발신인 지철근 수산국장, 수신인은 미 국무부 W.C.Herrington 특별보좌관(아래 본문에 소개됨)
지철근, 한국 수산행정의 기틀을 세운 영원한 수산인농수축산신문
지철근(池鐵根) 선생은 바닷가 섬마을에서 태어나 신생 대한민국 수산행정의 기틀을 세우고 우리 수산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창안·선포케 한 뒤 이를 수호한 소신 있는 공직자였습니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타고난 외교수완과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하여 우리나라 수산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고 ‘북양수산’을 창업하여 원양어업에 진출, 수산 기업가로도 성공하였습니다. 그분의 회고록 ‘수산부국의 야망(한국수산신보사 발간, 1992)’에 그분이 쓴 첫 구절을 인용합니다. “나는 바다에서 태어나 수산만을 생각하며 지금껏 수산계에 몸담아온 수산인으로 ‘영원한 수산인’으로 불리고 싶다.” (그 책 13쪽)
그분은 1913년 10월 12일 전남 고흥군 외나로도에서 태어나 일본 홋카이도대학 수산학부 양식과를 1937년에 졸업한 후 강원도 수산시험장에서 요즘 사무관 격인 산업기수로 공직생활을 시작, 3년 후 당시 정문기 선생이 있던 평안북도로 옮겨 근무하다가 8·15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 직후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지자 그분은 동료 몇 가족과 함께 평북 수산시험장의 지도선을 타고 서울출장을 핑계로 월남, 1945년 9월 19일 인천항에 도착하였습니다. 지 선생은 곧바로 한국수산기술협회의 추천으로 미 군정청에 들어가 1946년 2월 경북도 수산과장이 되었고 적산 처리업무를 수행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중앙으로 진출, 당시 정문기 수산국장의 부국장격인 행정관으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분은 혼란스러웠던 수산 행정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어업허가 남발을 규제하는 한편 빨리 어선 수리를 끝내고 출어시켜 어업을 조기에 활성화하는데 주력하면서 각종 수산시설의 복구와 수산자원의 보호에 역점을 두고 업무를 수행하였는데 이때 이미 일본어선의 불법 조업을 막을 조치로 뒷날 ‘평화선’이 된 ‘어업자원 관할수역’을 구상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앞의 책 15, 37~45쪽)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수산국은 상공부로 넘어갔는데 지 선생은 그 주축인 어로과장과 수산물검사소장을 겸직, 불타는 사명감으로 불철주야 일하다가 1952년 가을 수산국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국장 취임 후 그분은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어선의 복구와 신조선 건조 및 노후어선의 대체, 평화선의 수호와 어족자원 보호를 위한 부정어업 단속, 생산시설의 복구를 통한 연근해 어업의 진흥, 수산물 처리가공시설의 확충과 유통구조의 단계적 개선, 원양어업 진출을 위한 기반 구축, 젊은 수산인재의 양성과 해외파견 연수훈련 등 여섯 개 지표를 설정하고 1960년 4월 퇴임할 때까지 8년 8개월간 우리나라 수산행정의 실무 사령탑으로서 소신 있는 공직자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당시 한·일 수산부문의 실질적인 최고 정책결정자였던 도쿄의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 수산부장 헤링턴(W. C. Herrington) 박사와 경제고문관 셔벤(M. Shirven) 씨, 그리고 유엔 한국재건위원단(UNKRA) 단장 콜터(Colter) 장군 등과 친교를 맺고 그들의 협조를 얻어 1953년 5월 7일자로 SCAP, UNKRA와 대한민국간의 한·미 수산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이 협정의 주요 내용은 수산국장이 위원장인 ‘수산관리위원회’를 설치하고 미국의 수산부문 원조자금과 물자 배정에 관한 통제 조정을 할 수 있게 한 것이었는데 이에 힘입어 우리 수산업이 빠른 시일 내에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오늘날 수산입국의 기틀을 다진 밑바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상 같은 책 46~7, 51~62쪽 참조)
그분이 수산국장으로 남긴 업적으로는 건국 후 처음으로 ‘수산부흥 5개년계획(1954~1958년)’을 수립한 것과 한·미 합동경제위원회 기획위원으로 활약하면서 USOM 자금을 끌어와서 부산 어시장(현 부산 수산센터)을 건설하고 부산어업조합과 관련수산단체가 공동으로 운영하도록 결정한 일 외에도 수산단체의 기능 정상화와 국회의원의 단체장 겸직 금지조치, 어업조합의 김 직수출 방안 추진, 수산행정과 해사업무의 일원화를 위한 ‘해무청’의 설치, 수산 시험·연구사업의 활성화, 굴·새우 증산시책의 추진, 해녀의 처우개선을 위한 노력 등과 해방 전 일본 대양어업의 국내 자산을 적산으로 처리하면서 ‘한국원양어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를 출어시켜 훗날 우리 원양어업의 기초를 닦은 일 등이 꼽히고 있으며 뒷장에서 소개할 평화선의 수호도 물론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같은 책 65~72, 81~105, 167~87쪽 참조) 무엇보다도 그분의 소신과 열정, 과감한 추진력과 공정한 처신이 아니었더라면 이 모든 일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농수축산신문
재가를 하실 때 대통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주 썩 좋은 착상을 했습네다. 이거 대단히 필요한 일인 동시에 아주 시의에 맞는 조치입네다. ---이왕에 어업관할수역을 선포하려면 서해의 대륙붕을 감안해서 해저자원까지 모두 포함한다는 내용을 검토해보시요.--」라고.
여기에 대통령의 특별법율 고문인 닥터 올리버가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재고 요청을 건의 했다. 그러자 대통령께서는 아주 강하게 대일 관을 피력하신다.
「이거보라구. 미스터 올리버, 당신의 이야기에도 일리는 있습네다. 나 또한 국제법에 대해 문외한은 아닙네다. 그러나 당신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일본국민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고 있습네다. 일본이라고 하는 나라는 이미 세계 각국에 대해 그들 자신이 먼저 국제적인 신의를 저버린 아주 간교한 나라다 이런 말입네다. 음흉하고 잔꾀가 많고 국제적인 신의 따위는 헌신짝 버리듯 하는 교활한 국민들이다 이런 말입네다. 그 사람들과는 예의바른 신사적인 대화나 국제법규가 통하지 않는 아주 질이 나쁜 사람들입네다. 그런고로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는 국제법이라든가 협정이라든가 그 어떠한 약속이라는 것을 할 수가 없다 이런 말입네다. 이제 맥아더 라인이 철폐를 앞두고 그들이 어떠한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관계로 우리는 국제법상 어느 정도 무리가 있더라도 우리의 자원과 우리 국민을 위해서 또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의 주권을 행사해야하겠다 하는 것입네다.」 대통령의 의지는 단호했다. 1952년 1월 18일 해양주권국가로서의 자존심을 선언했다. 정말 국제법상 어느 정도 무리가 있더라도 여론을 무시하고 단행하였다. 참으로 통쾌한 일이 아닌가. 세계 각국은 우리를 향하여 악평을 했다. 그래도 버티어 냈다. 민족의 저력이다. 지금도 우리에게는 그런 힘이 있다. 하얼빈에서 홍구공원에서 우리는 저들을 향하여 싸웠다. 이 선포가 있고난 후 1년이 지난 후부터였다. 세계 여론이 너무 좋지 않아 1953년 2월 8일 외교부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이 인접해양에 관한 주권선언을 한 주 목적은 한일양국의 평화유지에 있다」라고. 이렇게 해서 평화선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일본은「이 라인」라고 불렀다. 일본은 히로시마 떨어진 원폭에 비유할 정도로 충격적인 반응이 였다고 한다.
이 자료는 지철근 박사가 지은 "평화선과 나의 수산 인생"에서 발췌하였고 1998년 11월 5일 한국수산신보사가 발행한 책이다.
1959년 사용례. 부부 명의로 연하장을 보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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