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도 수집해야 하나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지만 우편실체야 죄가 없으니......4종인쇄물.
참고로 나는 이 사람을 대한민국 장군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의 약력은 대한민국 장군이 아니라 북한군 장군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이런 인간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세상!.....
대한민국이 바로 서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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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흥 | |
출생 | 1921년 8월 3일 일본 나고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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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2011년 11월 26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 일본 → 대한민국 |
별칭 | 아호는 국헌(菊軒), 자헌(自軒) |
학력 |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 |
직업 | 군인, 외교관, 정치가 |
소속 | 前 대한석유공사 사장, 前 한국골프협회 고문 |
종교 | 개신교 |
배우자 | 윤의상 |
자녀 | 2남 3녀 |
부모 | 유승렬(부) |
유재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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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8월 3일 ~ 2011년 11월 26일 | |
별명 | 아호는 국헌(菊軒), 자헌(自軒) |
태어난 곳 | 일본 나고야 |
복무 |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
복무 기간 | 1941년 ~ 1960년 |
최종 계급 | 일본군 대위/대한민국 육군 중장 |
주요 참전 | 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
기타 이력 | 대한석유공사 사장 |
유재흥(劉載興, 1921년 8월 3일 ~ 2011년 11월 26일[1])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군인, 외교관, 정치가이다. 대표적인 친일파이며 6.25전쟁에서 수 많은 부대와 군단을 패배로 이끈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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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일본군 장교였던 유승렬의 아들로, 일본 나고야에서 출생하였고 다섯살 때 조선으로 돌아와 충청남도 공주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호는 국헌(菊軒), 자헌(自軒)이다.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55기로 졸업하였고,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에는 일본군 육군 대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미군정 시기에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국군 장교가 되었다. 제4여단장, 육군사관학교 부교장 등을 지냈고, 1949년 제주도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되어 제주 4·3 사건에 관여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제7사단장으로서 참전하여 의정부 축선을 책임지고 있었으나 북한군에 패전을 거듭하여 덕정-의정부-창동으로 축차 철수를 되풀이하였으며, 결과적으로 7사단은 붕괴 괴멸되고 서울이 함락당하게 되었다. 그후 1950년 7월 경북 함창에서 제2군단이 창설될 때 제2군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중국군 참전 이후 벌어진 덕천 전투에서 지휘 실수로 중국군 38군과 42군에 포위를 허용하여 제2군단이 전멸되어 해체케 하였으며, 현리 전투에서도 제3군단을 해체케하는 등 한국전쟁에서 지휘한 전투마다 패전하였다. 현리전투는 1951년 5월 중공군의 5월공세 당시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에게 점령당하여 지휘하던 3군단이 포위됐을 때 벌어진 전투로, 유재흥은 부군단장을 대리로 지정한 후 군단전체가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 군단 사령부로 복귀하겠다며 경비행기를 이용해 포위망밖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따라 3군단은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와해 상황이 되었으며, 사단장들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들이 지휘를 포기하고 계급장을 제거한 후 살기위해 무질서한 도피를 시작했다. 결국 현리전투의 결과 군단 병력의 30%와 중장비의 70%를 손실하게 되었고,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 장군에 의해 3군단은 해체되었다. 이 사건은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지휘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된 계기였다. 당시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국군의 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지휘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다. 1군단 또한 육군본부를 지휘선상에서 제외하고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하여서, 이 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상실되었다. 일본에서 자랐기 때문에 한국어가 서툴러 군에 명령을 하달할 때 "돌아가라"를 "또라가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2] 그는 1951년 7월 시작된 정전회담 당시 남한 옵서버로 참관했으나 부친 유승렬 대좌에 의해 어릴 때부터 일본 군인 교육을 받아 우리말을 알아듣지 못했다.[3]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뒤 정군 대상으로 지목되어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지만 5·16 군사 정변이 성공한 뒤 박정희 정권의 제3공화국에서 등용되어 타이, 스웨덴, 이탈리아 대사 및 대통령 특별보좌관, 국방부장관 등을 지냈다. 주 태국 대사로 있던 1962년 9월, 친선사절단으로 버마를 방문하였다. [4]퇴임 후에는 1974년부터 대한석유공사 사장으로 6년간 재직했다.
한국전쟁 시 잘못된 상황판단으로 본인 지휘하의 1개 사단과 2개 군단이 패주 후 해체되는 결과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공으로 1951년에 받은 태극무공훈장을 비롯하여, 수교훈장 등 여러 차례 훈장을 받았다. 1990년대에 전직 장성 모임인 성우회의 부회장과 회장을 지냈으며, 전시 작전통제권 회수 등의 국방 관련 현안에 대해 친미 성향의 보수 세력과 정치적인 행보를 같이 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군에게 일임하자는 운동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계속되는 패전과 무단도주로 작전통제권이 미군으로 넘어간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였지만, 1990년대 이후 작전통제권 반환 움직임에 결사 반대해 많은 비아냥을 사기도 하였다.
일부에서 1994년 탈출한 조창호 소위가 유재흥과의 면담을 원하였으나 조 소위가 2006년 사망할 때까지 일체의 만남을 거부했다는 말이 유포되었으나, 이는 유언비어이다.[5]
경북 경산 하양초등학교에는 유재흥 장군 전승기념비가 있다. [6]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아버지 유승렬과 함께 선정되었다. 2011년 11월 26일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가족 관계
- 아버지 : 유승렬
학력
비학위 수료
-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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