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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류지(法隆寺) 금당벽화의 관세음보살 우표첩

동인(東仁)姜海元 2009. 8. 13. 21:45

 

1951년 일본발행 호류사 금당벽화중 관세음보살 견본우표첩 $200에 경매에 출품.

 고구려의 고승 담징이 그린 것으로 유명한 벽화인데......

 

 

 

아래는 외대 홍윤기 교수의 카페 <서라벌문예원> 왕인 문학회 기고문입니다.

 

 

 ◇대표적인 금당 벽화 ‘아미타정토도’(제6호벽의 그림).

일본 나라(奈良) 땅 이카루가(斑鳩) 터전의 호류지. 이곳은 6~7세기 고대 한국인들의 뜨거운 숨결이 오늘에도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불교 성지(聖地)다. 일본 철도 JR칸사이 본선의 ‘나라역’에서 서남쪽으로 한 정거장만 더 가면 ‘호류지역’이다. 여기서 서쪽 나지막한 수풀 쪽으로 10분 남짓한 거리에 큰 가람이 펼쳐진다. 서기 607년 백제인 건축가들이 완공한 ‘금당’과 ‘오중탑’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다.

 

서기 588년부터 8년간의 공사 끝에 596년 나라 땅 아스카에다 ‘아스카데라’(飛鳥寺·본명 法興寺)를 완성한 것은 백제인 건축가 태량미태(太良未太)와 문가고자(文賈古子)였다. 또한 기와를 구운 책임자는 기와박사(瓦博士) 마나문노(麻奈文奴)와 석마대미(昔麻帶彌) 등 여럿이다(‘일본서기’). 이들 고대 구다라(百濟)인 성씨의 기본이 복성(複姓)이라는 점이 특징이고, 또 그것이 뒷날 처음으로 성씨를 짓게 된 일인 성씨 복성의 바탕이 되었다. 그런데 쇼토쿠 태자(574~622년)의 아버지 요메이(585~587년) 왕이 587년 4월 병석에 눕게 되자 쇼토쿠 태자와 가시키야 공주(뒷날 스이코 여왕)가 불력으로 요메이 왕이 쾌유하기를 발원하여 때마침 아스카에 와 있던 백제인 건축가들에게 호류지를 먼저 착공토록 청탁하여 장장 17년 공사 끝에 607년에 창건되었다. 호류지 착공 이후 얼마 안 돼 요메이 왕이 서거하자 공사는 중단되고, 그 대신 본래의 목적인 칠당가람(七堂伽藍: 일곱 가지 주요 당우를 갖춘 절) 아스카데라를 먼저 짓는 데 집중하게 되었다.‘절’을 일어로는 ‘데라(てら)’라고 하는데, 이 말은 평안도 사투리인 ‘뎔’ 소리에서 왜나라 선주민들이 ‘뎌르’로 발음하면서 차츰 ‘데라’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발자취는 서기 595년 아스카데라에 와서 쇼토쿠 태자를 가르쳤던 고구려 학승 혜자(惠慈) 스님 등이 평안도 사투리로 ‘뎔’이라고 말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이후 602년 학승 승륭(僧隆)과 운총(雲聰), 610년 학승 담징(曇徵·6~7세기)과 법정(法定·6~7세기) 스님 등 수많은 고구려 승려들이 아스카 백제인 왕실로 건너오면서 평안도 사투리인 ‘뎔’이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본다. 호류지의 금당은 본래 고구려 스님 담징의 ‘금당벽화’ 불상 그림 등 모두 열두 점이 벽면 사방에 훌륭한 벽화로 만들어져 있었던 법당으로 유명했다. 그 중 대표적인 벽화는 제6호 인 ‘아미타정토도(阿彌陀淨土圖)’이다. 담징의 벽화는 경주 석굴암, 윈강석불(雲崗石佛·중국)과 함께 동양 3대 예술품으로 평가돼 왔다. 그러나 여기서 먼저 슬픈 사연부터 밝힌다. 이렇듯 빼어난 ‘금당 벽화’ 12점은 불에 타 손상된 채 현재 그림 모두는 호류지 ‘수장고’에 보관(비공개)되고 있다. 매우 가슴 아픈 얘기지만 이 명화들은 1949년 1월 26일에 불탔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징의 금당 벽화 그림들을 직접 대면할 수 없다. 그러나 본 그림 열두 점 이외로 유일하게 화마를 모면한 담징의 그림이 있다. 그것은 금당 천장 안쪽에 붙였던 소형 그림 ‘비천도’이다.

금당 벽화 화재는 지금까지 57년간이나 원인이 전혀 규명되지 못한 채 미궁에 빠져 있는 사건이다. 그 당시 언론에서는 “금당 안에서 일본의 유명 화가들이 담징의 벽화를 모사하던 중에 화재가 발생했다. 원인은 화가들이 돌아간 뒤 겨울 추위 때문에 작업 중 깔고 앉았던 전기 방석에서 불이 난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방화설도 있었다”(町田甲一 교수)는 지적도 있다. 담징의 금당 벽화는 금당 내부에서 화재를 당하는 불운을 겪었으나 다행히도 서기 607년에 백제 건축가들이 세운 금당 그 본체만은 화마를 모면했다.

현재 호류지 금당에는 그 당시 실물을 흉내냈던 화가 야스다 유키히고(安田彦1884-1978년), 마에다 세이손(前田靑邨·1885~1977년) 등 여러 화가의 모사 그림들이 진품 대신 각 벽면에 예전처럼 장치되어 있다. 비록 모사 그림들이지만 담징의 금당 벽화를 바라보면 누구나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벽화의 웅장한 구도라는 그 스케일로부터 살아 숨쉬는 것 같은 정교하고 부드러운 묘선(描線) 등, 지금부터 약 1400년 전 고대 한국인의 훌륭한 예술혼을 우리는 칭송하지 않을 수 없다. 담징은 그림만 훌륭한 고승이 아니었다. 그는 일본 사람들에게 종이 만드는 제지법도 가르쳐 주고, 먹을 만들어 쓰는 법, 또한 새로운 생활도구로서 ‘맷돌’ 제작법도 지도했다는 것이 일본 역사 책에 밝혀져 있다.

◇유일하게 화마를 모면한 담징의 소형 그림 ‘비천도’. 천녀 둘이 천의를 날리며 하늘을 난다(왼쪽), 아미타정토도 속의 관세음보살.

“봄 3월에 고구려 왕(영양왕)이 승려 담징과 법정을 보내 주었다. 담징은 오경(五經)을 알았고, 채색(彩色) 및 종이와 먹을 잘 만들었다. 또한 맷돌을 만들었다”(‘일본서기’).

이름난 일본어 사전 ‘고지엔’(廣辭苑·이와나미서점·1963년)에는 “담징이 스이코 일왕 18년에 일본에 왔고, 채색화에 뛰어났으며, 호류지의 벽화를 그렸다”는 것까지도 상세하게 기록했다. 그러나 그 후 1970년대 ‘고지엔’을 찾아보면, ‘담징’이 “종이와 먹과 맷돌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고만 밝히고, “금당 벽화를 그렸다”는 대목은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발간된 ‘고지엔’에 와서는 그나마 ‘담징’ 항목 자체가 몽땅 빠져버린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째서 이와 같은 사전 편집상의 단계적인 큰 변화가 나타난 것일까.

8·15 광복 직후에 대한민국 문교부가 발행한 초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고구려 스님 담징이 일본에 건너가 호류지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돼 있다. 이때부터 해방 조국의 어린이들은 담징의 금당 벽화에 대한 긍지를 갖게 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 국정 역사 교과서 편찬의 텍스트가 된 것은 아마도 일제 때 일본 문부성이 발행한 일본 역사 교과서(고등소학 일본역사독본 1권·1924년)’의 내용이 아닌가 한다. 이 교과서는 “고구려승 담징이 호류지 금당 벽화를 그렸다”는 내용을 이모저모 상세하게 서술했다.

1980년대 ‘고지엔’에 와서 ‘담징’ 항목이 빠져나간 것은 고사하고, 일부 일본 학자들은 1900년대 초에 “1949년에 화재로 소실된 ‘금당 벽화’는 담징의 그림이 아니다”고까지 주장했다(黑川眞賴 등). 그들의 논거는 “호류지 금당이 서기 670년에 불이 나 뒷날 다시 금당을 재건했기 때문이다”(‘일본서기’)라는 ‘호류지 재건설’을 내세웠다. 그러나 호류지는 전혀 화재가 나지 않았으며, 다시 지은 것이 아닌 본래대로의 607년 건물이라는 ‘비재건설’(非再建說 1905년)을 입증한 것은 ‘고구려자’(高麗尺·고마샤쿠)로 금당 등을 실측한 도쿄대 건축학과 세키노 다다스(關野貞) 교수 등이었다. ‘호류지 재건설’ 이후의 일본 정부 문부성 역사교과서(1924년)에서도 담징의 금당 벽화를 인정했고, 더욱 뒷날인 일본어 사전 ‘고지엔’(1963년)에서도 역시 ‘비재건설’을 뒷받침했다.

◇호류지 금당 전경(왼쪽),‘호류지 메이지21년 녹사 사무소’라는 조사보고서.

따져볼 것도 없이 ‘호류지 재건설’은 ‘일본서기’가 빚어낸 평지풍파적인 역사 왜곡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일찍이 1885년 5월부터 그 당시 일본 정부 궁내성은 나라 지방의 각종 문화재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본격적인 조사를 시행하여 불교 문화재들이 한국에서 건너왔거나 한국 도래인들이 만들었다는 내용을 규명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궁내성 구키 류이치(九鬼隆一 1852~1931년) 도서료 책임자(圖書寮頭)를 비롯하여 오카구라 텐신(岡倉天心 1862~1913년) 도쿄미술학교 교수, 미국의 동양사학자 페놀로사(E F Fenollosa 1853~1908년) 교수 등 20여명이 대대적인 실물 답사 연구 조사를 했다. 이때 “금당 벽화는 담징식(曇徵式)이다”라는 완전한 결론도 났다. 그 당시 페놀로사 교수는 호류지의 팔각지붕 전당인 유메도노(夢殿) 안에서 백제 녹나무 ‘구세관음’을 찾아냈다.

궁내성의 나라지방 문화재 조사에 수행한 도쿄 ‘유빈호치신문(郵便報知新聞)’의 모리 시켄(森思軒)이라는 유명한 기자가 있었다. 그 무렵 모리 시켄 기자는 매일 상세한 문화재 조사 보고 기사를 써서 큰 주목을 받았거니와, 가장 대표적인 기사는 ‘나라의 고미술’ 제하의 1888년 6월22일자 톱기사였다. 그는 그 당시의 “호류지 금당 벽화는 ‘담징식’이다”고 규정했다. 모리 기자는 기사에다 각종 문화재의 분류 도식을 밝혔는데, ‘담징식’ 분류에 (1)금당 벽화 (2)동판불(銅板佛) 2면 (3)호키지(法起寺) (4)쇼린지 십일면관음건칠상(小林寺 十一面觀音乾漆像) 등 다른 사찰에도 담징 스님이 이룩한 불사(佛寺)와 건칠상 등의 문화재가 만들어진 내용을 상세하게 밝혔다. 그는 이 기사에서 오카구라 덴신 교수의 연구를 바탕으로 기사화했다고 지적했다. 그때 조사된 문화재들은 대부분이 구다라로부터 건너왔다는 것이 ‘호류지 메이지21년 녹사 사무소(法隆寺 明治貳拾壹歲錄事 寺務所)’라는 조사 보고서에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끝으로 한 가지 덧붙여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 노지마 고지(野島好二) 교수의 저서인 ‘교수자료 일본미술의 개관’(敎授資料 日本美術の槪說 1937년)의 ‘금당 벽화’에 대한 얘기를 살펴보자. “고구려에서 건너온 담징은 채색화의 명인으로 호류지 안에서 그림을 이끌었다. 전체적으로 조선풍으로 유치한 영역을 그다지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명인’이라는 찬사와 더불어 ‘유치한 그림들’이라고 앞뒤가 어긋나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