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이야기]국내 첫 ‘위작우표’ 감정 나왔다
"108~110년 전 소인이 찍힌 우표는 진품이 아니다.”
한국 우취계(郵趣界)의 해묵은 숙제인 ‘공문우편 미스터리’에 대해 우표 실물이 위조됐다는 한국우취연합의 감정 결과가 나왔다. 문제의 우표가 위조됐다면 이 우표로부터 제기되는 근대 우정의 풀리지 않는 의문은 모두 의미를 잃는다. 우정 역사를 새로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같은 우표를 놓고 외국 전문가는 진품이라고 판정한 적이 있고, 의뢰자 측에서 감정 결과에 승복하는 것도 아니어서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우취연합은 한국 우취계를 대내외적으로 대표하는 공식 기관이다. 이곳에서 감정위원회를 구성해 내린 결론은 공적 권위가 있다. 연합이 생긴 이래 우표의 진위를 판정하기 위해 감정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역사적 의미도 크다.
공문용 우표 논란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재독 우취전문가 이기열씨가 프랑스 경매장에서 구입한 것이라며 의문의 우표를 제시한 것이다.
이씨가 말하는 공문용 우표는 근대 우정의 문헌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우표 발행기록은 문위우표(1884년)-태극우표(1895년)-대한가쇄우표(1897년)-이화보통우표(1900년 1월)-일자첨쇄우표(1900년 2월) 순으로 돼 있다. 그런데 이씨는 대한가쇄와 이화보통 사이에 또 하나의 우표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가쇄(加刷)우표는 1897년 국호를 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종전에 쓰다 남은 태극우표에 글자를 덧씌워 인쇄한 우표다. 태극우표에 씌인 ‘朝鮮’이란 글씨 위에 ‘大韓’을, ‘죠선’ 위에 ‘대한’을 날인했다. 일자첨쇄(壹字添刷) 우표는 신문발송 우편요금으로 규정된 2리(1푼)짜리 우표가 없자 태극우표에 한자로 壹, 한글로 일, 아라비아숫자로 1자를 붉은색 또는 흑색으로 찍어 사용한 우표다.
그런데 이 두 종 외에 가쇄와 일자첨쇄를 동시에 한 우표가 있으며, 그게 공문우편에 쓰였다는 게 이기열씨의 주장이다. 일자첨쇄가 공식기록보다 2년 앞선 1898년(광무2년) 이미 나왔다는 것이다. 이씨는 그 증거로 ‘춘천 광무2년 10월’ 등의 일부인이 찍힌 우표 이미지를 공개했다.
한국 우취계는 발칵 뒤집혔다.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온 한국 우정사는 엉터리란 얘기다. 정부의 공식 간행물인 ‘한국우정100년사’ 등의 사료도 모두 고쳐 써야 한다. 우정사의 근본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취계는 지난 10여 년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뭔가 주장하려면 문제의 우표에 대한 진위 판단이 전제돼야 하는데, 100년도 더 된 우표를 감정할 전문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기열씨는 문제의 우표를 내보이며 수차례 “감정해달라”고 촉구했으나 우취연합은 번번이 묵살했다. 그러던 중 이씨 주장에 동조하는 재미 과학자 이강욱씨(2008년 한미학술대회 대회장이기도 하다)가 2006년 우취연합의 간행물인 우표지에 공문우편에 관한 논문을 5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에 우취전문가인 김요치씨가 반박 글을 싣는 등 논쟁이 뜨거워졌다. 더 이상 두고볼 수 없다고 판단한 우취연합은 이씨에게 “실물을 보내면 감정하겠다”고 했고, 이씨는 우표 8장을 제출해 사상 최초로 공식 감정이 이뤄진 것이다.
우취연합이 의뢰자 이씨에게 보낸 감정 결과 통지문은 딱 두 줄이다. “대한제국 일자첨쇄 우표는 법적 제원 및 준용기준에 불합치한다”는 것과, “의뢰품의 가쇄 및 첨쇄는 후날(後捺)되었다”는 것이다. 전자는 그 당시 일자첨쇄 우표가 나올 수 없으므로 역사적으로 모순된다는 뜻이고, 후자는 누군가 원래의 우표에 훗날 덧칠했다는 뜻이다.
강윤홍 감정위원장은 “사진 판독 결과 가짜라는 결론을 얻었다”며 “상세한 내용은 추후에 밝히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기열씨는 “이의신청을 하고 싶으나 공정하고 과학적인 재감정이 어렵고, 우취연합이 틀려도 틀렸다고 할 기관이 없어 걱정”이라며 불만을 나타냈다.
이 우표는 국내에도 일부 소장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이번 가짜 판정은 막대한 재산상 손실을 의미한다. 이 우표의 현재 가격은 알려진 바 없으나, 1980년대 말 2500달러에 한 쌍이 팔린 적이 있다고 이기열씨는 전했다.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났으니 어마어마한 액수가 걸린 진위 논쟁인 셈이다.
<이종탁 경향신문 논설위원> jtlee@kyunghyang.com
한국 우취계(郵趣界)의 해묵은 숙제인 ‘공문우편 미스터리’에 대해 우표 실물이 위조됐다는 한국우취연합의 감정 결과가 나왔다. 문제의 우표가 위조됐다면 이 우표로부터 제기되는 근대 우정의 풀리지 않는 의문은 모두 의미를 잃는다. 우정 역사를 새로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같은 우표를 놓고 외국 전문가는 진품이라고 판정한 적이 있고, 의뢰자 측에서 감정 결과에 승복하는 것도 아니어서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왼쪽) 우취연합이 의뢰자에 보낸 감정통지문. (오른쪽 위) 위작 판정이 난 공문용 우표. (오른쪽 아래) 스위스의 전문가가 진품이라고 판정한 감정서.
우취연합은 한국 우취계를 대내외적으로 대표하는 공식 기관이다. 이곳에서 감정위원회를 구성해 내린 결론은 공적 권위가 있다. 연합이 생긴 이래 우표의 진위를 판정하기 위해 감정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역사적 의미도 크다.
공문용 우표 논란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다. 재독 우취전문가 이기열씨가 프랑스 경매장에서 구입한 것이라며 의문의 우표를 제시한 것이다.
이씨가 말하는 공문용 우표는 근대 우정의 문헌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우표 발행기록은 문위우표(1884년)-태극우표(1895년)-대한가쇄우표(1897년)-이화보통우표(1900년 1월)-일자첨쇄우표(1900년 2월) 순으로 돼 있다. 그런데 이씨는 대한가쇄와 이화보통 사이에 또 하나의 우표를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가쇄(加刷)우표는 1897년 국호를 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종전에 쓰다 남은 태극우표에 글자를 덧씌워 인쇄한 우표다. 태극우표에 씌인 ‘朝鮮’이란 글씨 위에 ‘大韓’을, ‘죠선’ 위에 ‘대한’을 날인했다. 일자첨쇄(壹字添刷) 우표는 신문발송 우편요금으로 규정된 2리(1푼)짜리 우표가 없자 태극우표에 한자로 壹, 한글로 일, 아라비아숫자로 1자를 붉은색 또는 흑색으로 찍어 사용한 우표다.
그런데 이 두 종 외에 가쇄와 일자첨쇄를 동시에 한 우표가 있으며, 그게 공문우편에 쓰였다는 게 이기열씨의 주장이다. 일자첨쇄가 공식기록보다 2년 앞선 1898년(광무2년) 이미 나왔다는 것이다. 이씨는 그 증거로 ‘춘천 광무2년 10월’ 등의 일부인이 찍힌 우표 이미지를 공개했다.
한국 우취계는 발칵 뒤집혔다.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온 한국 우정사는 엉터리란 얘기다. 정부의 공식 간행물인 ‘한국우정100년사’ 등의 사료도 모두 고쳐 써야 한다. 우정사의 근본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취계는 지난 10여 년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뭔가 주장하려면 문제의 우표에 대한 진위 판단이 전제돼야 하는데, 100년도 더 된 우표를 감정할 전문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기열씨는 문제의 우표를 내보이며 수차례 “감정해달라”고 촉구했으나 우취연합은 번번이 묵살했다. 그러던 중 이씨 주장에 동조하는 재미 과학자 이강욱씨(2008년 한미학술대회 대회장이기도 하다)가 2006년 우취연합의 간행물인 우표지에 공문우편에 관한 논문을 5회에 걸쳐 연재했다. 이에 우취전문가인 김요치씨가 반박 글을 싣는 등 논쟁이 뜨거워졌다. 더 이상 두고볼 수 없다고 판단한 우취연합은 이씨에게 “실물을 보내면 감정하겠다”고 했고, 이씨는 우표 8장을 제출해 사상 최초로 공식 감정이 이뤄진 것이다.
우취연합이 의뢰자 이씨에게 보낸 감정 결과 통지문은 딱 두 줄이다. “대한제국 일자첨쇄 우표는 법적 제원 및 준용기준에 불합치한다”는 것과, “의뢰품의 가쇄 및 첨쇄는 후날(後捺)되었다”는 것이다. 전자는 그 당시 일자첨쇄 우표가 나올 수 없으므로 역사적으로 모순된다는 뜻이고, 후자는 누군가 원래의 우표에 훗날 덧칠했다는 뜻이다.
강윤홍 감정위원장은 “사진 판독 결과 가짜라는 결론을 얻었다”며 “상세한 내용은 추후에 밝히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기열씨는 “이의신청을 하고 싶으나 공정하고 과학적인 재감정이 어렵고, 우취연합이 틀려도 틀렸다고 할 기관이 없어 걱정”이라며 불만을 나타냈다.
이 우표는 국내에도 일부 소장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이번 가짜 판정은 막대한 재산상 손실을 의미한다. 이 우표의 현재 가격은 알려진 바 없으나, 1980년대 말 2500달러에 한 쌍이 팔린 적이 있다고 이기열씨는 전했다.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났으니 어마어마한 액수가 걸린 진위 논쟁인 셈이다.
<이종탁 경향신문 논설위원> jt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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