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고종석님의 겸손한 제안

동인(東仁)姜海元 2013. 12. 25. 15:28

<박근혜 대통령님께 드리는, 겸손한 제안>


 




저는 지난해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한, 쉰다섯 먹은 대한민국 유권자입니다. 문재인 후보에게 투표한 것은 그분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서가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만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제가 대통령님께 사적으로 미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이 탄생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역사를 사납게 할퀴며 민주주의를 말살한 독재자 박정희가 합헌적·합법적 방식으로 복권된다는 뜻이 되기때문에 저는 대통령님께 투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님은 제가 예상한 대로 과반의 지지를 얻으며 승리했고, 저는 그날 밤새도록 대한민국의 운명을 한탄하며 통음했습니다. 대통령님과 지리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기 위해 제주도를 떠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내 이성을 찾았습니다. 제가 바라던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일단 ‘박근혜 대통령’이 탄생했으니 박근혜정권이 잘 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박근혜정권이 잘 돼야 대한민국도 잘 될 테니까요.

저는 제가 지닌 유일한 매체인 트위터를 통해 대통령님을 감쌌고, 대통령님을 저주하는 반대파들을 야단치고 비판했습니다. 어찌됐든 대통령님은 저의 대통령이었으니까요. 윤창중씨를 대변인으로 발탁했을 때 크게 실망했지만, 인사권이야 대통령에게 있는 것이니 그걸 탓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대통령님에 대한 반대파의 비판이 점점 뾰족해지며 부정선거 담론이 횡행하기 시작할 때도, 저는 질서를 존중하는 보수주의자로서 대통령님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선거 다시 해야 한다는 돌출적 주장이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위대한 6월 시민항쟁이 낳은 한국민주주의가, 민주주의적인 제6공화국이. 조금은 덜컹거리더라도 뒤집어지지 않고 전진하기를 바랐습니다. 불법대선운동에 대한 검찰수사를 청와대와 보수언론이 노골적으로 방해할 때도, 유권자로서의 최대요구를 특검법으로 보고 대통령님의 하야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제 경찰이 민주노총을 불법적으로 침탈해 대한민국에서 법의 지배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그 불법사태에 대한 대통령님의 참으로 한가하신 반응을 보고, 제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대통령님은 당선과정에서의 불법선거운동 때문에 정통성을 의심받는 대통령이 아니라, 헌법과 법률을 무수히 어긴, 정통성 없는 대통령이 되어버렸습니다. 새누리당이 국회과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탄핵소추야 받지 않으시겠지요. 그러나 시민불복종운동은 앞으로 거세게 일어날 것입니다.

대통령님! 대통령님은 지난 일년간 국가수반 자리에 앉아있기에는 도덕적 권위와 소통능력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외교는 우아한 한복패션과 유창한 외국어연설로, 내치는 종북몰이로 한 게 전부였습니다. 헤아리기 어려운 공약파기는 문제삼고 싶지도 않습니다. 파리의 시위대를 협박한 나꼼빠 검사 출신의 국회의원, 정직한 경찰관의 고향이 어딘지를 궁금해 하는 탈북자 출신 국회의원,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과잉이라고 주장하는 국회의원들 때문에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충분히 훼손됐습니다. 그 못난 국회의원들은 그저 대통령님의 총애만을 바랍니다. 사람이 사람을 격렬히 증오하고, 사람이 사람을 결코 믿지 못하는 공포분위기가 대통령님 치세 한 해도 못돼 일어났습니다.

물론 미치광이인지 어릿광대인지 알 수 없는 젊은이가 철권을 휘두르며 공포정치를 하는 북한이 우리 코앞에 있지요. 그 북한은 대한민국 안보에 대단히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애매한 사람들을 종북으로 몬다고 해서 대한민국 안보가 지켜지지는 않습니다. 자유롭고 번영하는 대한민국이야말로 그 자체로 안보의 토대입니다. 그런데 대통령님은 지금 대한민국 시민들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국론의 통일이 아니라 국론의 다양화야말로 자유와 민주주의의 증거입니다. 대통령님 주변에 군과 공안검사 출신들이 포진해있는 것도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매우 불길한 일입니다. 국가안전보장회의는 군장성출신들로 채워질 모양입니다. 그러나 외교·안보를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카보우르나 비스마르크 또는 헨리 키신저 같은 민간인 출신의 지혜로운 외교관들이지 종북몰이밖에 모르는 군 장성들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엔 대통령님의 선친 같은 정치군인들이 다시 머리를 치켜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부분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대통령님의 무관심과 무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대통령님에게도 기회는 있었습니다. 취임 초기에, 불법대선운동에 간여한 이들을 모조리 기소하고(당연히 이명박 전 대통령이 포함돼야겠죠), 능력 있고 참신한 이들로 권력 중심을 채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대통령님은 아버지의 과오까지를 부분적으로 만회하는 행운의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대통령님은 범죄자들과 한패가 되는 길을 택하셨고, 이젠 그 잘못을 만회하기에도 때가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박근혜 대통령님! 사임하십시오.

대통령님이 사임하시고 다시 선거를 치른다 해도, 대통령님이 만드신 새누리당의 재집권은 명확합니다. 대통령님은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새누리당 정권은 민주주의와 더불어 국가안보에도 빈틈이 없을 것입니다. 정치군부보다는 지혜로운 민간인이 통제하는 군부가 안보에 훨씬 유능합니다. 사임하시고, 독서나 여행이나 집필 같은, 은퇴 정치인의 일반적 코스를 따르십시오. 그게 대한민국의 안보와 민주주의를 위한 최선의 길입니다.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대통령님은 아직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셨습니다. 이 행운은, 양손이 무고한 사람들의 피로 범벅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만이 아니라, 대통령님의 정적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는 것으로 대통령님은 소명을 마치셨습니다.

28일부터 민주노총이 총파업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저는 본디 민노총을 지지하지 않는 보수주의자입니다. 그러나 정부의 민주주의 훼손에 저항하는 민노총 총파업은 지지할 겁니다. 보수주의자의 가장 큰 미덕은 법의 준수와 수호입니다. 대통령님은 보수주의자의 이 커다란 미덕을 팽개치셨습니다. 총파업이 길어지면, 국회에 있어야 할 민주주의가 거리로 뛰쳐나올지도 모릅니다. 일이 그렇게 진행된다면, 저도 87년6월에 그랬듯 거리로 나서게 되겠지요.

대통령님은 그걸 원하십니까? 박근혜정부의 손에, 개인 박근혜의 손에 피가 묻기를 바라십니까? 대통령님은 대통령에 당선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이루셨습니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것이 현자의 덕이라 들었습니다.

박근혜정부의 성공을 진심으로 깊이 기원했던 유권자로서, 대통령님이 사임하시기를 정중히 요청합 니다.

늘 강건하십시오.

2013년 12월23일 고종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