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1964 중장으로 제5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냈으나, 1950년 8월 해병대 사령부 정보참모(중령)로 제주도민 학살 명령을 내린 주범으로 지목되어 말년은 그리 당당하지 못한 삶을 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짐.
실체는 1959년 포항 연하특인이 찍힌 미국행.
당시는 준장 김두찬.
<아래 글은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에서 퍼옴>
전 해병대 사령관 김두찬을 고발한다
5·16 쿠데타와 양민학살
글 이도영 『죽음의 예비검속』 저자
2001년 4월 26일 오전 필자는 ‘미국 문서기록보존소’에서 한국전쟁 관련 비밀문서들을 열람하고 있었다. 조용하던 기록보존소 ‘리서치 센터’가 미 국방성 고위급 장성들, 언론사 기자들, 촬영팀들로 갑자기 북새통을 이루었다.
또 큰 사건이 터진 모양이란 것을 직감한 필자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보일랜 학예관을 찾아가 무슨 영문인지를 물어 보았다. 그는 한 ‘비밀문건 요약서’를 복사하여 필자에게 건네주었다. “밥 케리 전 상원의원(네브래스카 주, 민주당 2선)이 1969년 2월 25일 베트남전쟁 때 메콩강 델타지역 ‘탠퐁’마을에서 작전 중 대부분 여자들과 어린이들인 민간인 13명을 죽였다고 자백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 작전으로 ‘동성훈장’을, 그 후에도 미 대통령이 참전용사에게 주는 최고훈장인 ‘명예훈장’을 받았다.
다른 이들은 민간인을 살해한 것이 “어둡고 달빛 없는 밤, 베트콩 진지에 접근하는 동안 일어난 ‘자기방어’였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이것은 비극이다. 그리고 내가 명령했다. 그날 밤 사건 이후 나는 한시도 평안한 마음을 지닐 수가 없었다. 나는 32년 동안 이로 인해서 번민해 왔다”며 베트남 국민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그는 군에서 그의 “훈장을 거두어 가도 좋다”고 말했다.
◆ 제주국제공항 활주로 밑의 원혼들 ◆
베트남전에서 민간인을 살해한 사건보다 더 엄청난 대량학살사건이 한국전쟁 당시 제주도를 비롯한 남한 전역에서 일어났지만, 그 전모는 이제야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양민학살 관련자 대부분은 이후 이른바 ‘5·16 군사혁명의 주체세력’이 됐다.
1950년 8월 20일 제주도에서 새벽 2시와 5시경 2차에 걸친 ‘예비검속자’ 총살집행은 당시 해병대 사령부 소속 모슬포 부대(제3대대)에 의해서 자행되었다. 모슬포 경찰서 관내에서 예비검속됐던 347명 중 253명이 육군본부 제주지구 CIC에 넘겨지고 그 중 252명이 해병대에 의해서 학살되었다. 이런 기록은 제주도 모슬포 경찰서(서장 강문식)의 극비문서 「전 제주지구 예비검속자 명부제출의 건」에 의해서 밝혀졌다.
당시 제주읍에서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군 트럭 약 13대 분의 예비검속자들이 해병대 사령부 소속부대(제주읍 부대)에 의해서 총살 암매장되었다. 그러나 5·16 쿠데타 이후 이에 관련된 경찰기록 비밀문서들은 거의 모두 파기되어 버렸고, 수많은 유해들은 수습도 못한 채 제주국제공항 확장공사 후 활주로 밑에 깔려 증거인멸되었다. 이제 와서 학살 주범들은 소위 ‘오리발을 내밀고 있다.’
이에 앞서 6·25 당일 오후 3시경, 내무부 치안국장은 각도 경찰국장에게 전통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경계의 건」을 발하고 ‘국민보도연맹 가입자’ 및 ‘요시찰인’들을 예비검속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6월 30일 통첩 「불순분자 구속처리의 건」 이후 경찰에서 이들을 검속해 계엄군에 인계하면 군은 이들을 총살, 암매장하였다. 즉, 이들의 ‘사상’을 D, C, B, A급으로 분류하여 이 중 ‘가장 중한 자’인 D급과 ‘중한 자’인 C급을 거의 모두 처형하였다.
제주도에서는 약 1천 명으로 추산되는 예비검속자들이 해병대 사령부에서 총살 후 암매장되거나 수장되었다. 현재까지 수습된 유해의 숫자는 약 2백10구뿐이다. 필자와 유족들은 나머지 유해의 행방을 학살현장 책임자인 김두찬에게 묻고 있다. 신현준 당시 사령관도 현재 생존해 있긴 하지만, “군에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참말로 유감이다”라고만 할 뿐 더 이상은 묵묵부답이다.
◆ 김두찬을 찾아내다 ◆
이런 학살을 진두지휘한 육군본부 정보국 제주지구 CIC(대장 조석만, 계급 미상) 해병대 사령부 정보참모 김두찬과 내무부 치안국 정보과 선우종원은 어떤 인물들인가? 그들은 왜 이런 끔직한 만행을 저지르고도 현재까지 아무런 ‘회개’도 하지 않고 있는가? 수천, 수만 명의 민간인을 대량학살하고도 ‘양심’이 마비되었단 말인가? 아니면, 기억에서 영영 지워 버린 것인가?
먼저 필자는 당시 해병대 사령부 정보참모 김두찬의 행적을 추적했다. 어렵게 알아낸 그의 집으로 2000년 8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서면질의서를 ‘내용증명’ 등기로 보내고, 그의 자백을 촉구했다. 물증으로는 그가 제주를 떠나기 하루 전인 1950년 8월 30일 문형순 성산포 경찰서장에게 하달한 「예비검속자 총살 집행명령서(해정참 16호)」를 복사, 첨부하였다.
그러나 2001년 3월 29일, 그는 회개는커녕 사건 자체를 “전연 몰랐다”고 부정하는 「회신문」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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